금관가야,가야국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금관가야,가야국에 대해 알아보자]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워낙 짧게 배우고 지나가는 가야 역사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가야라는 나라가 역사도 짧고 나라라고 딱 지정해서 말하기도 애매한 연맹국가의 체제이기도 하며 신라에 결국 복속되는 나라이기때문에 길게 배우고 지나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은 이런 가야 연맹국 중 하나였던 금관가야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 금관가야 가야국
금관가야는 6개의 가야국 중 한 나라로 가락국이라고도 불렸으며 초기에는 여러 가야 중에서도 맹주국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 또는 본가야 라고 불리던 금관가야 국입니다. 금관가야는 서기 전후부터 532년까지 경상남도 김해를 중심으로 존재했다고 알려집니다. 금관가야는 초기에 여러 가야국 중에서도 맹주국 즉, 중심국이었기때문에 대가야 혹은 본가야라고 불리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에서는 금관가야를 구야국이라고도 표현했고 왜인조에는 구야한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참고로 구야는 가야를 한자로 표시한 음입니다. 금관가야는 사실 본가야라고도 하는데요. 원래 9촌에 각각 장이 있어 각촌을 다스리다가 김수로왕이라 불리는 왕이 탄생하고나서야 9촌이 통일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농업이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남쪽으로는 또 바다와 밀접하게 접해있어 낙동강과 함께 경제적,문화적 발전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습니다. 그랬기때문에 사실 금관가야가 초기에 여러 가야국 중에서도 맹주국이 되어 대가야라고 불릴수 있게 되었기도 했습니다.
사실 가야라고 하면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김유신이 많이 떠오를 것입니다. 가야는 532년 법흥왕 19 시기에 마지막 왕인 구해가 신라에 나라를 바친 뒤 높은 벼슬을 받고 가야를 식읍으로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후에 그의 아들인 무력이 신라와 백제간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뒤에 신주도 행군총관이 되었다고 알려져있기도 합니다. 이 무력이 바로 우리가 아는 김유신의 할아버지입니다.
532년 금관가야는 신라에 복속되고 김유신 일가를 위시한 금관가야계 유민들이 신라의 진골귀족과 구별을 두기 위해 신김씨를 칭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덕왕,혜공왕 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금관가야의 후손들은 그 입지가 매우 약화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신라라는 진골귀족이 있는 곳에서 당연히 금관가야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입지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겠지요.
한편 금관가야의 멸망에 대해서는 사실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를 대표적인 사료로 보고 참조하는 것이 대부분인데요.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편년 기사를 둘다 인정할 때는 529년에 금관 4촌이 함락되고 532년에 그 왕이 투항했다는 설이 맞고 일본서기의 3년의 오차를 인정한다면 삼국사기의 기년에 맞추어 4촌 함락과 금관가야의 투항을 모두 532년으로 봐야 한다는 설입니다. 두 설은 사실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문에 사실 금관가야의 발전이나 성장 멸망 등을 문헌과 같은 사료로만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이는 금관가야에 해당하는 것만은 당연히 아니기도 하지만요. 따라서 우리는 실제 있었다고 여겨지는 고고학적 발굴재에 그 역사와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이 더 맞을수도 있는데요. 그 예로 1970년대 이후 김해 예안리 고분군,김해 양동리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등 꾸준한 발굴 성과가 축적된 김해가 금관가야의 최중심지였다고 판단해도 무리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 그 예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금관가야는 그 역사가 짧았던만큼이나 사실 문헌이나 고고학적 발굴재에도 한계가 있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그 역사가 없는 것도 아니며 의미가 없는 것도 당연히 아니겠지요. 금관가야가 없었다면 분명 그 때의 신라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그토록 잘 아는 김유신 장군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한 역사의 한 구성이기도 하고요. 그 의미를 잊어서도 안되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듯이요.
이상 금관가야,가야국의 역사 발전 멸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금관가야의 멸망은 사실상 신라의 재편입이라는 입장에서 해석도 될수 있다고 하니 이 의미 또한 한번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짧지만 찬란하게 꽃피웠던 문화를 간직한 금관가야, 대가야, 가야국의 발전 성장 역사 멸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